흔적

Hamburg,2023

설날 아침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에 깼다. 어제도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피곤했던 탓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날뻔 했는데 치코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평소 맡을 일이 전혀 없는 피냄새에 정신이 확 돌아오면서 다급하게 피를 닦고 치코의 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심각해보여서 바로 병원을 알아봤다. 방광염때문에 몇번 혈뇨를 보긴 했지만 이렇게 진하고 선명한 피를 본건 처음이었기에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 패닉이 왔다. 병원에 가서도 계속해서 혈뇨를 여기저기 보면서 진료를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중국 출장을 자주 가게 되면서 파양한다는 글을 보고 내가 입양을 한다고 했다. 그 분은 대구에서 직접 서울로 데려다 준다며 몇 시간을 달려왔고 도착했다는 말에 조수석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사료도 잘 먹고 접종은 3차 까지 했다고 여러 이야기를 듣고 우리집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치코와의 첫 만남은 차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치코를 데려왔던 이유는 이기적이게도 단순히 내 외로움때문에 데려왔다. 치코는 무책임한 나에게 책임감을 가르쳐줬다. 또한 언제나 반겨주고 무한한 사랑을 주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런 치코에게 나는 기다려란 말을 제일 많이 했다. 무한한 사랑은 때로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함을 잊게 한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무관심하게 된다. 나도 분명 치코에게 그런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다시 느꼈고 생각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끼던 찰나 피를 봤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떠올랐고 감정을 억누르려 하는데도 갑자기 울컥한다. 차라리 내가 아프고 싶다. 벌써 10일째인데 빨리 괜찮아져서 매일 나갈까? 란 말에 신나서 꼬리흔들며 다가오는 치코를 보고싶다. 치코에게 한 단어만 가르칠 수 있다면 아파 라는 말을 가르치고 싶다. (2014.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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