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상 아주 간단한 행복 논리. 지금 행복하면 나중에 행복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조건부로 행복의 기준을 올리고 난 뒤 그 수준에 도달하면 이미 심리에서 당연시되기 마련이고, 그새 새 기준이 생긴다. 이런 헛구역질 나는 과정으로 살게 된 이유는 우리가 12년 넘게 오로지 경쟁만 배우고 이기거나 지거나 게임에 갇혀버렸기 때문에. 그러니 늘 결핍과 성과만으로 삶을 평가하는 경쟁심에 매몰되는 게 상수일 수밖에. 행복은 일상에서 누리는 포옹, 격려, 배려, 사랑 담긴 눈빛과 관심과 말 그리고 이해하려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에서 오는 법. 결핍에서 시작된 사랑은 늘 허덕이게 만들어 주변 사람에게 특히 나 자신에게 인정, 존중, 사랑을 쉽게 주지 못하게 만든다. 오로지 결과적 성과만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만들어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들어 갈수록 무엇 하나 새로이 시도 못하고 닫힌 마음으로 정신적 심리적 가난에 허덕이게 만든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삶을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 보자. 그리하면 다가올 미래에도 난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될 테니.
치코가 수술 후에 잠시 좋아졌다가 다시 상태가 좋아지지 않고 나서부터 엄마와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말을 매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퉁명스럽게 ‘너무 고통스러우니 안락사 해야 할 거 같은데..’라는 말을 별다른 감정 없이 했었다. 그리고 치코가 떠난 후에 조용해진 집에 있는 것은 낯설었기에 나가서 무작정 걸었다. 걷다가 조금 지쳐서 서울로 위에서 서울 스퀘어 건물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순간 마음이 너무 아파지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내내 울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치코가 좋아하던 장난감과 유골을 농장에 묻어주고 치코의 마지막 털을 반지를 만들기 위해 보내고 나서 친구와 밥을 먹으러 갔다. 친구의 지금은 어떠냐는 물음에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치코가 떠나기 직전의 나를 떠올려 생각해 보았다. 그때의 나는 그저 치코의 떠남을 외면하기 바빴던 거 같다. 받아들이는 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데몰리션의 제이크 질렌할 처럼 무덤덤한듯했지만 이건 마치 빙산의 일각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은 크랙이 조금씩 나다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게 오늘이다. 오늘도 산책을 하다 치코가 가던 길을 따라가다보면 모든게 무너져 내린다. 어떠한 걸로도 위로받을 수 없을 이 감정의 파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지..